진기록도 많은 국회

ㅡ1948년 제헌국회 이래
76년 연혁을 이어 온 국회,
이제 다시 총선거를 실시합니다. 
모두가 이성으로 좋은 인물을 
뽑아야 하겠습니다―

오는 4월 10일의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지금 전국은 때를 만나 그야말로 고조된 열기로 뜨겁습니다. 전국 254개 지역에서는 여야가 모두 공천자를 내놓고 경쟁을 하다보니 마치 사생결단을 다투듯 온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한 지구에 평균 3명씩 출마를 한다고 해도 대충 900명이 나선 셈이니 사회가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학연, 지연, 혈연으로 얽히고설킨 사회이니 모두 연줄에 얽혀 뜨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회는 1948년 10월 31일 제헌국회를 시작으로 의회정치를 시작한 이래 올해까지 76년에 걸쳐 21대의 연륜을 쌓는 동안 수많은 수난을 격었습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는 1948년 10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원한 뒤 21대 45년에 이르는 기간 의원들의 각종 진기록을 모은 ‘국회 진기록관’을 운영 중입니다. 22대 총선거를 눈 앞에 놓고 그동안 국회의원들의 각종 기록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모두 알다시피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입니다. 그러나 재·보궐 선거에 당선됐거나 기타 사정에 따라 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의원들도 있습니다. 역대 최단기 국회의원 임기는 불과 3일을 역임한 의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의사당에 등원해 보지도 못하고 기록에만 남겨져 있을 뿐이니 복이 없다고나 할까.

역대 국회의원 가운데 최단기 의원은 5대 국회의원인 정인소(무소속 충북 음성), 김사만(민주당 충북 괴산), 김성환(무소속 전북 정읍), 김종길(민주당 경남 남해) 의원 등 4명입니다. 이들은 1961년 5월 13일 치러진 보궐 선거에서 당선돼 선거 다음 날인 14일 중앙선관위로부터 당선증을 받았지만 이들의 당선증은 3일간만 유효했습니다.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국회가 해산됐기 때문입니다. 이들 4명의 의원들은 금배지도 달아보지 못한 것은 물론 본회의장에서 의원선서도 하지 못했습니다. 세비 역시 단 한 푼 받지 못했습니다. 실제 시간상으로 의원직을 유지한 게 48시간도 안 되기 때문에 ‘48시간 짜리 국회의원’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들 의원과 함께 강원도 인제군 보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돼 3일 만에 의원직을 상실했습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1963년 6대 국회 때 고향인 목포에서 재선에 성공했고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6선 의원을 역임했습니다. 수난도 많았지만, 복도 많았던 셈입니다.

‘5일짜리 의원’도 있었습니다. 6대 국회의원인 박중한, 우갑린 의원입니다. 두 의원은 신민당 전국구(비례대표) 후보 17·18번이었는데, 같은 전국구 의원인 류진, 임차주 의원이 탈당하며 1967년 6월26일 의원직을 승계했습니다. 이들의 재임 기간은 제6대 국회 임기 만료일인 6월 30일까지였습니다. 단 5일 동안을 재임했지만, 한 달 세비 20만 원을 수령했습니다.

최단기 국회의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입니다. 이 전 대통령은 제헌국회 의장으로 1948년 5월31일~1948년 7월24일까지 55일 동안 국회의장직을 맡았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의장직을 신익희 의원에게 넘겼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 첫 사회자이기도 했는데 당시 국회법이 최고령자가 사회를 맡도록 정해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 대통령의 당시 나이는 74세였습니다.

최장수 국회의장은 6대와 7대 국회에 걸쳐 의장을 맡은 경북 대구 출신의 이효상의원입니다. 이 의장은 1963년12월17일~1967년 6월30일(6대), 7대 국회 1967년 7월10일~1971년 6월30일까지 총 7년 6개월 7일간을 의장직을 수행했으니 운이 좋았습니다.

국회 본회의에서 가장 짧은 발언으로 국회 기록관에 오른 의원은 3대 국회의 하을춘(경남 창원) 의원입니다. 하 의원은 본회의장에서 단 4글자 만 발언을 했습니다. 발언 시간은 딱 1초. 국회 회의록에 따르면 하 의원은 본 회의에서 건설법안 심의 때 등단해 “건설법안”이라며 말을 시작하려 했지만 이기붕 국회의장이 법안 일괄 통과를 선포하는 바람에 발언대에서 내려왔습니다.

1948년 10월 31일 지금은 없어진 중앙청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 의장이 연설을 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48년 10월 31일 지금은 없어진 중앙청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 의장이 연설을 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다음으로 짧은 발언은 3대 국회의 김동욱 의원(무소속 부산정)이 한 9자 발언입니다. 김동욱 의원은 무소속 김선태 의원(전남 완도)의 구속에 항의하기 위해 발언대에 오른 뒤 배석한 장관들을 향해 “왜 잡아? 왜 잡아가?”라고 큰 소리로 고함을 친 후 단상에서 내려왔습니다. 9글자 속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은 ‘알짜 발언’이었습니다.

역대 의원 중 가장 발언 속도가 빨랐던 의원은 3·4·5대 의원을 지낸 김선태 의원입니다. 김 의원은 1분당 약 468자의 속도로 발언을 했습니다. 의원들의 평균 발언 속도가 1분에 300자인 걸 감안할 때 ‘속사포’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숙련된 속기사의 최대 속기능력은 1분에 320자였는데 김 의원의 발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국회는 김 의원의 발언을 기록하기 위해 속기사 2명이 동시에 속기를 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국회는 2명의 속기사가 동시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국회 본회의에서 발언을 가장 많이 한 의원은 3대 국회 때 박영종 의원(전남 광주)으로 임기 4년 동안 450회를 발언했습니다.

역대 선거 중 최다 득표로 당선된 의원은 12대 국회의 신한민주당 김동규(서울 강동) 의원입니다. 김 의원은 22만7598표(55.56%)를 얻어 당선됐습니다. 청주 출신인 김 의원은 국회의원이 되기 전 대우 사장을 역임했습니다. 두 번째로 많은 표로 당선된 의원은 제10대 국회의 김수한(서울 관악) 의원으로 21만2061표를 얻었습니다.

가장 적은 표로 금배지를 단 의원은 5대 국회의 손치호(경기 옹진)의원입니다. 손 의원이 얻은 표는 1058표에 불과했습니다. 손 의원 선거구의 인구수가 원래 작은데다 17명의 후보가 난립했기 때문입니다. 손 의원에 이은 최소 득표자도 옹진에서 나왔습니다. 재선거에서 손 의원을 누르고 당선된 장익현 의원으로 1477표를 받았습니다. 5대 전석봉 의원(울릉) 1513표, 3대 최병권 의원(울릉) 1741표 등이 뒤를 잇습니다.

역대 최소 표차로 당선된 의원은 16대 국회 한나라당 박혁규(경기 광주) 의원입니다. 박 의원은 새천년민주당 문학진 후보를 3표 차로 꺾고 당선됐습니다. 당시 박 의원은 1만6675표, 문 후보는 1만6672표를 얻었습니다. 3표차로 떨어진 문학진 후보는 이후 ‘문세표’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두 사람의 승부는 문 후보가 낸 당선 무효소송으로 법원까지 갔으며 법원의 재검표 결과 표 차는 2표로 더 줄었습니다. 그러자 ‘문세표’ 별명은 ‘문두표’로 바뀌었습니다. 17대 국회 때 자민련 김낙성 (충남 당진) 의원은 1만7711표를 얻어 1만7702표를 얻은 열린우리당 박기억 후보를 9표차로 눌렀습니다.

최연소 당선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치러진 3대 총선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고향인 경남 거제에서 당선됩니다. 만25세 5개월 28일의 나이였습니다. 5대 국회 때 전북 무주 진안 장수에서 당선된 전휴상 의원도 25살이었지만 김 전 대통령보다 2개월 빨리 태어나 1위를 놓쳤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최연소 기록 외에도 최다선 의원 기록도 갖고 있습니다. 3대, 5~10대 13~14대 국회까지 9선을 했습니다. 박준규 전 의장, 김종필 전 총리도 9선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최고령 국회의원은 14대 문창모 의원이었습니다. 문 전 의원은 1992년 정주영 회장의 통일국민당 소속 전국구 1번으로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문 전 의원의 나이는 만 85세 1개월 8일이었습니다. 문 전 의원은 1995년에는 88세로 최고령 국회의원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습니다.

장시간 발언기록인 필리버스터(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도 국회 진기록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19대 국회 때인 2016년 민주당의 은수미 의원이 10시간18분 연설을 하기 전 국회 최장 발언 기록은 7대 국회 때 박한상(서울 영등포)의원이 갖고 있었습니다. 박 의원은 3선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법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에서 1969년 8월 29일 오후 11시 10분부터 8월 30일 오전 9시 10분까지 10시간 동안 발언을 했습니다. 박 의원은 개헌 지지성명과 반대성명, 헌법, 공무원법 등을 인용했습니다. 박 의원의 발언을 기록하기 위해 60여명의 속기사가 동원됐습니다.

필리버스터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빼놓을수 없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6대 국회에서 자유민주당 김준연(전남 영암·강진)의원의 체포동의안을 막기 위해 1964년 4월 20일 본회의에서 오후 2시 37분부터 오후 7시 56분까지 5시간 19분 동안 발언을 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장시간 발언에 이효상 국회의장은 표결을 포기하고 폐회를 선언했습니다. 김준연 의원은 국회 회기가 끝난 뒤 결국 구속됐습니다. 김 의원은 “박정희 정권이 한·일 비밀회담을 통해 일본자금 1억3000만 달러를 수수했다”고 발언했다가 검찰로부터 체포동의 요청을 받았던 것입니다.

최초의 여성 의원은 제헌국회의 임영신(경북 안동) 의원입니다. 임 전 의원은 1949년 1월13일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임 의원은 당선 인터뷰에서 “안동은 완고하고 배타주의적인 곳이요, 여성을 멸시하는 풍속이 아직도 남아있는 곳이나, 이제 이와 같은 고풍은 완전히 타파된 셈이다”라고 감격에 찬 발언을 했습니다. 임 의원은 초대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국회에 처음 입성한 의원은 17대 국회 장향숙 의원입니다. 장 의원은 2004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장 의원은 2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하체가 마비됐습니다. 최초의 시각장애인 의원도 17대 국회에서 탄생했습니다. 정화원 의원은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당선됐습니다. 정 의원은 의정보고서를 점자책으로도 냈습니다. 19대 국회의 더불어민주당 최동익 의원도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필리핀 출신의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은 다문화가정 출신 의원이고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은 최초의 탈북민 의원입니다.

이제 우리는 10일 국민 개인은 물론 여야정당, 국가의 운명이 걸린 22대국회 총선거를 실시합니다. 전국 254개 지역에서 1명씩 선출을 하고 비례대표 46명을 합쳐 총 300명의 국회의원이 새로 탄생합니다. 그동안 신문 방송의 여론 조사를 통해 대충 민심을 알 수는 있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희비가 엇갈리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합니다. 정치의 비정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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